
퇴직 후 가장 하고 싶은 일을 물으면, 많은 분들이 망설임 없이 "여행"이라고 답합니다.
저 역시 오래전 보험 일을 하던 시절, 버킷리스트를 적으면서 크루즈 여행을 맨 위에 올려뒀습니다. 그때는 막연한 꿈이었는데,
15년이 지난 지금 제가 실제로 크루즈를 즐기고 있다는 사실이 스스로도 가끔 신기하게 느껴집니다. 시니어 세대의 여행이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지, 직접 겪어보며 느낀 점을 나눠보겠습니다.
은퇴 후 여행이 1순위인 이유
"퇴직하면 뭐 하고 싶으세요?"라는 질문에 운동이나 취미 활동을 꼽는 분도 계시지만, 압도적으로 많은 분들이 "일단 여행부터"라고 하십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직장 다닐 때는 연차를 쪼개가며 3박 4일 패키지를 다녀오는 게 전부였으니까요.
50~60세대를 가리키는 액티브 시니어(Active Senior)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액티브 시니어란 은퇴 이후에도 경제적 여유와 건강을 바탕으로 활발하게 사회 활동과 여가를 즐기는 중장년층을 뜻합니다. 이 세대가 퇴직 후 가장 하고 싶은 활동으로 '관광·여행'을 1순위로 꼽았다는 건, 단순한 통계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한 시니어 여행 전문가는 MZ세대가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추구한다면, 시니어는 '대확행(크고 확실한 행복)'을 원한다고 표현했습니다. 쉽게 말해 그동안 열심히 달려온 인생에 대한 보상을 크고 화려하게 받고 싶다는 심리입니다. 이게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백화점 문화센터에 가보면 여행사 상담 창구가 문화 강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현실로 눈앞에 펼쳐집니다. 제가 직접 가서 봤을 때 솔직히 좀 놀랐습니다. 온갖 여행 전단지가 빼곡했고, 크루즈부터 남미 한 달 코스까지 없는 게 없었습니다.
버킷리스트가 현실이 되는 순간
버킷리스트(Bucket List)라는 말은 이제 일상어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버킷리스트란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일이나 달성하고 싶은 목표를 적어놓은 목록을 뜻합니다.
시니어 세대에게 여행은 버킷리스트 중에서도 상위에 자주 오르는 항목입니다.
특히 남미 여행은 여행의 끝판왕처럼 여겨집니다. 비행 시간만 30시간이 넘고, 최소 2주에서 4주는 잡아야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경비도 수천만 원 수준이고, 고산병이나 치안 문제 같은 현지 변수도 적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분들이 "언젠가 꼭 가겠다"며 눈을 빛냅니다. 지난번 강서50플러스센터 세미나에서도 남미 여행 사례 발표 때 질문이 가장 많이 쏟아졌습니다. 제가 직접 그 자리에 있었는데, 사람들의 눈빛이 달랐습니다. 정보를 얻으러 온 게 아니라, 용기를 얻으러 온 것 같았습니다.
저 역시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처음 크루즈에 승선했을 때, "왜 이걸 여행의 끝판왕이라 부르는지 알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습니다. 바다 위에서 맞는 아침, 여유로운 식사, 천천히 흐르는 시간. 일반 패키지여행과는 분명히 다른 결이 있었습니다. 제 딸은 원래 배낭여행 스타일이었는데, 함께 크루즈를 다녀오고 나서 오히려 딸이 더 크루즈에 빠지게 됐습니다. 크루즈 하면 나이 든 사람이 가는 여행이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세대를 넘어서 함께 좋아질 수 있는 여행이라는 점에서 인상 깊었습니다.
한달살이, 관광을 넘어선 삶의 방식
최근 시니어 여행에서 가장 빠르게 퍼지고 있는 키워드는 단연 한달살이입니다. 한달살이란 특정 지역에 한 달 정도 머물며 현지인처럼 생활하는 장기 체류형 여행 방식을 말합니다. 단순히 명소를 빠르게 돌아보는 관광과는 다르게, 그 지역의 일상 속에 스며드는 것이 핵심입니다.
국내에서는 제주도, 거제도, 울릉도 같은 섬 지역이 한달살이 장소로 인기를 끌고 있고, 해외에서는 일본이나 동남아시아 지역이 선호됩니다. 제가 세미나에서 들은 발표 중에는 일본 한달살기와 남미·필리핀 한달 여행 사례도 있었는데, 공통적으로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삶이 달라졌다"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시니어 세대가 한달살이를 선택하는 이유는 단순히 오래 머무는 것만이 아닙니다. 현지에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사회적 연결감, 그리고 낯선 환경 속에서 스스로를 재발견하는 경험이 삶의 긍정감을 높여준다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를 체험 관광(Experiential Tourism)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체험 관광이란 단순 관람이 아닌 현지 문화와 생활에 직접 참여하는 방식의 여행을 의미하며, 최근 시니어 여행 트렌드의 핵심 개념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시니어를 대상으로 한 여행 상품도 이미 달라지고 있습니다. 주목할 만한 변화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하나투어: 인문학, 트레킹 등 취미를 테마로 한 프리미엄 상품 강화
- 노랑풍선여행: '청춘은 바로 지금'이라는 이름으로 시니어 감성 자극
- 교원투어: 시니어 전문 상품 '여행이지' 운영, '효도관광'이나 '실버관광'이라는 표현은 사라짐
'효도관광'이라는 말이 사라졌다는 사실이 저는 꽤 상징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시니어 스스로가 여행의 주체가 되었다는 뜻이니까요.
숫자로 보는 시니어 여행 시장
숫자를 보면 흐름이 더 선명하게 보입니다. 2024년 상반기에만 총 1,402만 명의 한국인이 해외로 여행을 떠났고, 이는 전년 동기 대비 41.2% 증가한 수치입니다. 1인당 소비액은 약 130만 원(934달러) 수준이었습니다(출처: 한국관광공사 한국관광 데이터랩).
50대 이상은 해외보다 국내 여행을 더 자주 떠나는 경향이 있다는 통계도 있지만, 단순히 횟수의 문제가 아닙니다. 시니어 여행자들이 원하는 것은 점점 더 세분화되고 있습니다. 맞춤형 체험 강습 프로그램, 지역 자연과 문화를 깊이 있게 경험할 수 있는 콘텐츠, 그리고 초고령 부모를 동반한 케어 여행까지 수요가 구체화되고 있습니다.
케어 여행(Care Travel)이란 거동이 불편하거나 의료 지원이 필요한 동반자와 함께하는 여행으로, 의료 인력이나 전문 가이드가 동행하는 형태를 말합니다. 아직 국내 상품이 많지 않아 아쉽다는 의견도 있는데, 저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고령화 속도를 생각하면 이 분야의 상품 개발이 더 빨라져야 한다고 봅니다.
고령화가 여가 시장의 신성장동력이 되고 있다는 것은 이제 업계의 공통된 시각입니다. 실제로 시니어 인구 증가와 여행 소비 패턴의 변화는 서로 맞물리며 시장을 키우고 있습니다(출처: 통계청).
시니어 여행은 더 이상 "남들처럼 한 번 다녀오는 것"이 아닙니다. "나다운 경험을 하겠다"는 방향으로 분명히 바뀌고 있고, 저도 그 변화 한가운데에 서 있는 사람 중 하나입니다. 버킷리스트로만 남아있던 크루즈 여행을 실제로 즐기게 된 것처럼, 막연하게 꿈꾸던 여행이 생각보다 가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아직 첫걸음을 못 떼셨다면, 한달살이나 크루즈처럼 자신의 여행 스타일에 맞는 형태부터 천천히 알아보시는 것을 권해드립니다. 여행은 결국 나를 위한 시간이니까요.
참고: Copyright © 아시아경제